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이 났을 때 남자와 여자의 반응은 어떻게 다를까? 아내는 남편과 상대 여성 중 누구를 더 공격하는가? 반대로 남편은 바람난 아내와 그 상대 남성 중 누구를 더 공격하는가? 자신의 남편과 바람이 난 여자를 대하는 여성들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다. 엄밀히 말해서 바람을 피우는 기혼남의 경우 남자가 상대 여성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훨씬 많음에도 아내는 상대 여성이 남편을 유혹했다 생각해서 그녀를 더 공격한다. 아니 설사 내 남편이 먼저 꼬셨다 해도 거기에 넘어간 여자가 중죄를 지었다고 느낀다. 왜 여자들은 남자가 더 책임이 큰 경우에도 여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더 많이 쏘는가? 필리스 체슬러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복종하고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의존하는 태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여자들이 서로에게 입히는 상처도 더 커지게 된다. 남성이 가지는 기본적인 권위가 확고한 상태에서 여성은 남성을 건드리지 않고 여성을 공격한다. 경쟁과 질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바로 여성이기에 남자 대신 그녀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아들을 낳아야 하는 집안에서 시어머니는 그 책임을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씌운다. 남녀를 결정하는 염색체는 남자의 정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과학적 지식이 널리 퍼졌음에도 그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한다. 어떤 어머니도 자신의 아들을 구박하며 "너는 아들도 못 낳는 무능력자구나"라고 비난하는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어느 집 남편이 바람이 나면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서라며 나무라고 그 며느리는 바람난 남편보다 그 상대방인 불륜 여성을 찾아가 싸우는 일이 발생한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일수록 여성은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남성은 아예 제쳐놓고 여성들끼리 공격을 주고받는다. 여성은 똑같은 죄를 지은 남녀가 있을 경우 같은 여성에게 더 반감을 느낀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남성에 대한 호감이 더 커서인지 아니면 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껴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한 것은 같은 여성을 단죄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이다. 여성이 좀 더 성숙한 시야를 가진다면 무작정 결과만 보고 다른 여성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성폭행을 당한 여성을 볼 때마다 주변 여자들이 수군거리며 그녀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를 저지른 남자를 볼 때마다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 피해자인 여성을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는 일을 여성이 맡아서는 안된다.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A Thousand Splendid Suns에 나오는 마리암과 라일라의 이야기는 두 여성이 가지는 우정과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다. 처음엔 처와 첩의 관계로 서로를 질투하지만 남편의 일방적인 하대와 폭력 앞에서 그녀들은 갈등의 대상이 서로 아님을 인식한다. 그래서 서로를 돕고 새 삶을 꿈꾸는 동반자가 된다. 사회적 시스템조차 남편의 폭력과 학대를 용인하는 상화에서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결국 마리암은 남편을 살해하고 라일라에게 새 삶을 열어주며 죽음 앞에 선다. 나이 든 여자인 마리암은 그 나이만큼 충분히 어른스럽고 따뜻했으며 나이 어린 라일라는 어리지만 경우 바르고 속이 깊었다. 성숙한 두 여자가 만들어내는 케미가 얼마나 멋진가! 의식이 앞선 여성들은 이런 점을 인식하고 남성의 잘못에 여성을 비난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가령 여성 연예인의 성관계 비디오가 나돌아도 보지 않거나 이를 삭제해주기도 한다. 피해자인 여성을 관음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범죄자인 남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정확한 피드백을 그녀들은 실천하는 것이다. 혁신적인 여성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는가. 직장에서 생기는 불공평한 문제나 불합리한 정책에 대해 항의를 해 본 여성은 의외로 남자 상사보다 같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더 많이 받는다. 소위 말해서 '나대는 여자"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오히려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환경에 무난하게 적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누군가 나서서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면 그것에 일단 거부반응을 보인다. 특히 겉으로 보기에 무리 없이 굴러가는 조직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면 그것은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로 간주가 된다. 허브 골드버그는 <남자, 여자를 해석하다>에서 여성의 낙천적 시각을 이렇게 설명한다.
남자의 프로세스가 바깥세상(정글이야)에 대해 냉소와 불신과 반항을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여자의 프로세스는 그와 정반대의 의견을 창조하고 있다. 남자의 시각에서 보면 순진하고 극단적으로 비칠 정도의 낙천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이 자신의 시야에 좋아 보이는 것들은 정말로 좋은 것이라 믿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보이는 이미지를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를 설명한다.
다수가 긍정의 마음으로 현재 상황을 유지할 때 누군가 저항을 하면 여성들은 그가 안락함을 빼앗아 간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자라면 보다 분노는 강화된다. "네가 뭔데 난리야?"가 되는 것이다.
조직의 현재 시스템을 비판하는 여자는 자신에게 힘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일단 남자들의 반응부터 보자. 직장의 남자들이 가진 생각은 자신이 여직원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휘둘리거나 비판 받는 상황은 생각지도 않는다. 뭔가 지적을 당했다면 "어떻게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공격을 당하지?"라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의를 제기하는 여성 부하에 대해 남자 상사는 더욱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거나 혹은 이 여성 부하를 왕따 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자신의 입지가 겨우 부하 여직원 때문에 약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사실은 직장 내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여성을 다른 여성들 또한 기피한다는 것이다. 안정된 소속감을 원하는 여성들은 조직과 의견이 다른 여성을 이질적으로 느끼면서 자신의 신병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래서 직장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여자는 남자 상사에게 여자 동료들에게도 왕따를 당할 확률이 높다. 셰어 하이트는 <왜 여자는 여자를 싫어할까? >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 중에는 남자 편만 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녀들은 세뇌된 남성적 주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자를 우습게 여기는 거죠" 남성적 주체성을 가진 여성이란, 직장에서는 동료 여성을 무능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남성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게 만들고,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꾀하려는 여성을 말한다. 희망을 상실하고 불안에 쫓겨 그렇게 행동하는 여성도 있다. 여성에게 상처를 주는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대다수의 여성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 '남성 지배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것이라 염려한다. 여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남성에게 보복을 당하는 것과 더불어, 동료 여성에게 외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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