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우리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버리고 배출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생명이라는 완벽한 리듬과 흐름 속에 있는 몸은 섭취와 소화와 배출간의 균형을 필요로 한다. 묵은 것을 배출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밖에는 없다. 변비인 사람들은 실제로 인색하지는 않다 해도 모든 것이 항상 충분히 있다는 걸 믿지 않는 편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묵은 관계를 부여잡고 있으며, 몇 년씩 옷장 속에 묵혀져 있는 옷도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질식할 것 같은 업무도 군말 없이 감수하면서 자신에게 절대 즐거움을 선사하지 않는다. 궂은날을 대비해서 아껴두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한 끼를 먹자고 어젯밤에 먹다 남은 찌꺼기를 뒤지지 않는다. 생명 과정이 항상 필요한 것은 당신에게 가져다 주리란 걸 믿어라. 다리는 삶에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다리에 생긴 문제는 종종 앞으로 나아가는 데 대한 두려움이거나 특정 방향으로 나가는 데 대한 꺼림칙함을 의미한다. 우리 중에는 다리로 달리는 사람도 있고, 다리를 질질 끄는 사람도 있으며, 살금살금 걷는 사람도 있고, 안짱다리인 사람도 있으며, 한쪽 다리가 짧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분노로 가득한 굵은 허벅지를 가진 사람도 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 다리에 사소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정맥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정맥이 기쁨을 운반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무릎은 목처럼 유연성과 관련되긴 하지만, 굴종과 자존심,에고와 완고함만을 표현한다. 앞으로 나갈 때 우리는 종종 굴복할 것이 두려워 경직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관절이 경직된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고 싶어 하면서도 길을 바꾸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무릎을 고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다. 에고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팔꿈치도 관절이긴 마찬가지지만, 다쳐도 아주 쉽게 고칠 수 있다. 반면에 무릎은 우리의 관련 자존심과 독선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고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다음번에 무릎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독선적인지, 어떤 지점에서 굽히기를 거부하는지 자문해 보라. 완고함을 떨쳐버려라, 삶은 흐름이고 운동이다. 편안하려면 유연하게 삶과 더불어 움직여야 한다. 버드나무는 바람이 부는 대로 구부러지고 흔들리고 나부끼면서 언제나 삶에 대해 유려하고 느긋하다. 지금부터는 발에 대해 알아봐요. 발은 우리의 이해, 자신과 현재 과거 미래 삶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노인들이 걷기 힘들어할 때가 있다. 그들의 이해가 왜곡되어 있는 데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행복하게 춤추듯이 움직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종종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발을 질질 끌며 걷곤 한다. 우리의 피부는 우리의 개성을 상징한다. 피부에 생기는 문제는 대체로 자신의 개성이 어떤 식으로든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피부에 생긴 문제를 치유하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하루에 몇백 번이라도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해"라고 하면서 자신을 북돋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힘을 되찾도록 하라. 사고는 전혀 사고가 아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 또한 우리가 불러일으킨 것이다. 굳이 "난 사고가 나길 원해"라고 말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사고를 끌어들일 수 있는 사고 유형이 있어서란 이야기다. 이 때문에 마치 "사고 제조기"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생채기 한번 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고는 분노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고는 자신을 변호할 자유가 없다는 느낌에서 비롯된 습관화된 분노를 의미한다. 또 사고는 권위에 맞는 반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화가 나서 상대방을 한 방 먹이고 싶기 때문에 대신 자신을 때리는 것이다. 자신에게 화가 나거나 죄의식을 느낄 때, 혹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낄 때, 사고는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경이로운 방법이다. 아마도 모든 사고가 자기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고, 자신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무력한 희생자인 듯이 보일 것이다. 사고는 우리더러 남들의 연민과 배려를 받을 수 있게끔 해준다.
우리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간호를 받게 된다. 게다가 침대에 눕게 되는 일이 많고, 가끔은 꽤 긴 기간을 그렇게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게다가 우리는 아프기까지 하다. 이런 통증이 몸의 어떤 부분에서 발생하는가를 보면, 우리가 삶이 어떤 영역에서 죄의식을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 신체 손상의 정도는 우리가 스스로 내리는 벌의 강도와 그 선고 기간을 알려준다. 거식증과 폭식증은 둘 다 자신의 생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기 증오의 극단적 양태들이다. 음식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의 자양분인데, 당신은 왜 자신에게 자양분 주기를 거부하는가? 당신은 왜 죽고 싶어 하는가? 당신 생활 중의 어떤 부분이 세상을 완전히 뜨고 싶어 할 만큼 그토록 끔찍한가? 자기 증오는 자신이 자신에 대해 지닌 생각을 증오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은 바뀔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을 왜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가? 혹시 잔소리가 심한 가정에서 자랐거나, 흠 잡기 좋아하는 선생이 있었거나, 어린 시절의 종교적 가르침이 당신더러 당신의 본래 모습으로는 "그다지 쓸모 있지 않다"라고 말했던 건 아닌가? 이처럼 우리는 왜 자신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가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를 쓸 때가 많다. 날씬함에 대한 패션 산업계의 강박관념 때문에 "나는 쓸 만한 사람이 못 돼.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어"라는 생각을 자신들의 주요 메시지로 삼는 많은 여성들은 몸을 자기 증오의 초점으로 삼곤 한다. 어떤 차원에서 그들은 "내가 날씬한 몸매를 갖기만 하면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아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해결의 열쇠는 자기 긍정과 수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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